<#테니스 스커트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

 

- 2016년, 걸그룹 무대와 길거리를 뒤덮은 순수한 섹스어필을 향한 자유의지

김뉴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


올해 초, 트위터에서 한 뉴스 인터뷰 동영상이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영상 속에서 앵커는 90년대 ‘X세대'의 새로운 패션을 소개하면서,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의 취향대로 옷을 입는 신세대들을 인터뷰한다. “남의 시선을 느끼지 않습니까?”라는 앵커의 질문에, 검은 부츠를 신고 배꼽이 보이는 탱크탑을 입은 여성은 “아니요,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제가 입고 싶은 대로 입구요.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거든요.”라고, 무심하면서도 똑 부러지는 말투로 대답한다. 영상을 본 사람들은 동영상 속 가장 강렬한 대사를 인용해 '#이렇게_입으면_기분이_조크든요'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진한 화장, 타투, 겨드랑이가 드러나는 나시 탱크탑, 짧은 포마드 헤어스타일을 한 자신의 사진을 올리며, 여성의 패션이 남성들에게 성애의 대상으로 어필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이 해시태그에서 지시하는 ‘기분’이란 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 느끼는 만족감으로, ‘기분이 좋다’는 문장은 외부의 시선이나 사회적 압력이 이런 나 자신의 만족감보다 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이 해시태그의 유행이 계속되면서 본래의 맥락이 배제되거나 왜곡된 트윗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미 너무나도 보편적인 취향이기 때문에 누구도 눈총을 주지 않을, 그러니까 사회가 정의하는 ‘적절한 의상’의 좁은 한도 내에 위치한 ‘안전하고 예쁜’ 취향을 전시하는 트윗들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사회 규범에 도전적인 취향만 좋은 취향이냐’ 혹은 ‘순수한 나의 취향을 왜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맞추어 넣은 것으로 보느냐’며 ‘취향 존중’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 글은 바로 그 ‘취향의 다이어그램’에 관한 글이다. 즉 사회와 미디어가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협소한 범위의 미의 기준이라는 작은 원, 그리고 그것에 속하지 않는 다른 수많은 취향의 집합 속에서, 나의 취향이라는 집합의 원은 어디에 그리고 어쩌다 그곳에 위치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고찰해보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많은 테니스 스커트는 어디서 왔을까

 

  누군가 나에게 2016년 상반기의 패션 유행을 하나 꼽아보라 한다면 그것은 테니스 스커트가 될 것이다. 테니스 스커트란 골반 부근부터 각진 주름이 퍼지도록 디자인된 A라인 스커트를 일컫는다. 움직일 때마다 살랑거리는 치맛 주름이 포인트로, 발랄함·순수함·쾌활함·활동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전달하는, ‘소녀 이미지’에 딱 맞는 스커트라고 할 수 있겠다. 테니스 스커트의 유행이 얼마나 대단했느냐 하면, 음악방송을 틀면 언제나 그룹명은 달라도 비슷한 테니스 스커트를 입은 걸그룹이 등장하고, 지하철을 타면 한 칸에 테니스 스커트를 입은 여성이 최소 3명 이상 보일 정도였다. 

 

  많은 아이돌 커뮤니티는 아이돌 의상 또는 일상복으로서의 테니스 스커트 유행의 시발점을 동남아시아 교복의 ‘프레피 룩’에서 영감을 받은 에프엑스의 <첫 사랑니(2013)> 무대의상으로 여긴다. 이전에 아이돌의 무대의상에 교복류의 의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깔끔하고 핏이 타이트한 일명 ‘프레피 룩’을 내세운 것은 에프엑스가 처음이었다. 일반적으로 걸그룹의 교복 의상은 보는 이의 심리적 장벽을 낮추기 위해, 진짜 교복의 모습을 그대로 따오기보다는 교복의 모습을 은유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2013년 <첫사랑니> 활동 이전의 원더걸스, 걸스데이, 카라 등의 교복 컨셉 무대의상이 화려한 색상과 액세서리로 무현실 속 소녀와 거리감을 두며 무대의상임을 강조하고 일반 교복과의 차이점을 부각하는 방식이었다면, 에프엑스의 프레피 룩은 거꾸로 현실에 실재하는 여중생과 여고생의 이미지를 무대 위로 직접 끌어와 ‘테니스 스커트’라는 아이템으로 대상화했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지닌다. 에프엑스의 프레피 룩 이후 애니메이션 속 일본의 교복이나 체육복, 혹은 한국의 예술고등학교 교복의 외양을 무대의상으로 가져오며 미성년자의 성적 대상화를 은근히 부추기는 걸그룹이 급증했다. 미디어와 애니메이션에서 구현된 소녀의 이미지를 실재 교복-고등학생의 이미지와 연결해 엮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테니스 스커트와 교복 모에

 

  2014년 상반기까지도 대부분이 섹시 컨셉을 추구하던 걸그룹 속에서 ‘청순’을 컨셉으로 잡는 아이돌은 에이핑크가 거의 유일했다. 그러나 섹시 컨셉 열풍이 과열되며 레인보우 블랙, AOA, 나인뮤지스, EXID 등 여러 그룹이 안무나 의상의 선정성을 이유로 방송 불가 판정을 받는 일이 일어났다. 특히 2014년 초에 등장한 그룹 스텔라의 곡 <마리오네트>는 한국 가요계에서 밀어붙일 수는 있는 섹시 컨셉이 이미 극한까지 도달했음을 보여줬고, 인터넷에서도 이러한 경향에 대해 ‘지겹다’ 거나 ‘너무 심하다’는 여론이 힘을 얻었다. 곧 이러한 기류를 감지한 아이돌 계는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했고, 2014년 11월 러블리즈 그리고 2015년 1월 여자친구의 데뷔를 기점으로 청순한 컨셉의 아이돌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러블리즈와 여자친구는 교복-학생 컨셉의 의상을 3곡 이상의 무대에서 꾸준히 활용했으며, 뮤직비디오의 배경으로 학교라는 공간을 설정함으로써 일본 애니메이션 속 노스탤직한 소녀의 이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로써 교복은 단순한 무대의상으로서의 스킨이 아닌, 특정 걸그룹이 지향하는 구체적인 정체성-아무것도 모르던 그때의 순수했던 소녀들-을 드러내는 장치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등장한 ‘청순 컨셉'의 걸그룹은 이전의 걸그룹이 내세웠던 섹스어필을 아예 포기했을까? 물론 그렇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서 테니스 스커트의 아이러니한 두 가지 기능이 드러난다. 첫 번째, 교복을 은유해 ‘순수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미성년자 소녀’의 이미지를 만들어 낼 것. 두 번째,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길이에서 펄럭이며 대중들의 ‘엿보고 싶은 욕망'을 자극해 눈길을 사로잡을 것. 서로 다른 이 두 기능은 결국 아이돌이 자신이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어필하는 존재로 비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숨기고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를 적극적으로 연기하도록 만들었다. 섹시하고 강한 걸그룹의 시대가 지나간 뒤 떠오른, ‘너는 순수했음 좋겠어. 근데 성적으로 어필도 했으면 해… 물론 대 놓고는 말고.’라는 다소 꼬인 요구에 대한 화답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테니스 스커트였던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짧아 허리가 다 보이는 상의, 속바지가 보일 수밖에 없는 길이의 짧은 치마의 무대의상들은 교복의 기능을 상실한 아이러니의 산물이다. 아슬아슬한 길이의 치마를 입고 다리 라인을 강조하면서도 어딘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어, 사진작가 로타의 소녀 사진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전형적인 티저 이미지들 또한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준다. 로타 작가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페티시적인 속성이 강한 스쿠미즈, 부르마, 세라복 등의 의상을 입고 ‘난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듯한 멍한 표정을 지은 채 비정상적으로 특정 신체 부위를 강조하는 포즈를 취한다. 이러한 로타 사진의 특징은 미성년자처럼 보이는 소녀가-의도하지 않았다는 듯-성적 함의가 담긴 포즈로-신체 부위를 은밀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Figure 1

 

판치라, 관음의 시선 

 

‘엿보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는 테니스 스커트의 수동적 섹스어필은 ‘판치라’라는 개념과도 관련되어 있는데, 판치라란 보통 애니메이션 속에서 의도치 않게 캐릭터의 팬티 일부가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판치라의 페티시적 속성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 보라는 식으로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닌, ‘치마 속을 감추려는 의지가 있음에도 치마 속이 보일 듯 말 듯하다.’는 점, 그러나 동시에 ‘아무리 애써봐야 보이지 않을 게 틀림없다.’는 느낌에서 오는 짜릿함이다. 미성년자인 소녀의 순수함을 나타내면서도 바람이 불면 언제든 치마 속이 노출될 가능성을 가진 테니스 스커트의 속성은 이러한 목적에 정확히 부합한다. 사실 격렬한 운동을 하다가 넘어진 테니스 선수의 판치라 - 무대 위에서 춤을 추다가 살짝 보인 아이돌의 판치라 - 아침에 식빵을 물고 달리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보인 애니메이션 주인공의 판치라는 같은 관음적인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 관중들은 판치라를 입은 대상이 자신의 치마 길이를 의식하고 있지 않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치마 속을 ‘의도치 않은 듯’ 자신에게 슬쩍 보여줄 것을 기대한다. 소녀시대의 데뷔곡인 ‘다시 만난 세계(2007)’ 안무 중 크게 발차기를 하는 장면만을 네티즌들이 캡처해 모아놨던 일은, 대중이 이러한 수동적 섹스어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아이돌 기획자들이 이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알 수 있었던 하나의 지표였다. 

 

  언젠가부터 무대의상에서도, 일반 의상에서도 속바지가 달린 테니스 스커트가 당연시되는 현상 또한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결국 테니스 스커트를 입는 사람들이 ‘자신의 치마 속이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뜻이며 아이돌의 경우 그것을 전략으로서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속바지는 아이돌 혹은 여성의 움직임을 좀 더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안전장치인 동시에 판치라의 ‘엿보는 즐거움’은 그대로 남겨두면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는 죄책감’은 없애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판치라의 핵심은 ‘팬티’가 아닌 ‘치마 속을 들여다본다는 쾌감’이기 때문이다. 교복, 학교의 이미지와 펄럭이는 치마의 속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가장 대표적인 예로 그룹 여자친구를 들 수 있다. 여자친구는 위에서 언급했던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부류의, 청순한 의상과 힘 있는 안무를 동시에 보여주는 무대로 본인들의 정체성과 이미지를 굳힌 그룹이다. 여자친구의 멤버들은 무대에서 파워풀한 안무를 소화하는 데에 정신이 없으므로 춤을 추는 동안 펄럭이는 치마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고 (혹은 그렇다고 연기하고 있고), 그러므로 치마 안에 속바지를 착용한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속바지란 안전장치는 과감히 펄럭이는 그들의 ‘치마 속’을 관중이 좀 더 거리낌 없이 들여다봐도 괜찮은 알리바이가 된다. 아이돌이 속바지를 입었기 때문에 사진기자들은 치마가 흩날리는 순간을 적나라하게 찍어 올리고, 누구든 기사에서 치마가 격하게 펄럭이는 사진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속바지가 달린 짧은 테니스 스커트는 착용자인 여성에겐 자신의 순수함과 무해함을 드러내면서도 은근한 섹스어필을 가능하게 하며, 이를 지켜보는 사람에겐 자신의 관음적 호기심을 합리화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미성숙한 소녀의 이미지

 

  이러한 경향은 일상복으로써 테니스 스커트 유행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남초 사이트에서는 테니스 스커트가 일명 ‘남자들이 좋아하는 치마’로 불렸고, 관련 포스트에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치마 속이 보여서 좋다’는 뉘앙스의 댓글이 추천 최상위에 올라와 있는 일이 빈번했다. 이처럼 테니스 스커트가 남성 일반에게 어필했던 포인트는 주로 ‘입으면 어려 보이고 소녀다우면서도 관음 욕구를 자극한다는 점’이었다. 재밌는 것은 많은 여성이 남성 일반의 생각은 자신의 의상 선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외부 시선이 미치는 영향력을 완전히 부정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반응들은 남성들의 합리화 기제를 여성들이 그대로 받아들여 “나는 순수한 소녀이고 성적 어필을 할 의도는 추호도 없다.”는 여성 버전의 합리화 기제를 만들어낸 것처럼 보였다.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는 리허설을 거친 연기이고, 그것을 써먹는 특정 연기자들보다 더 오래 존속하는 각본으로서, 다시 한번 현실에 실현되고 재생산되기 위해 연기자들을 필요로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테니스 스커트가 소녀-역할놀이를 위한 현실의 무대의상 같은 것이었다면, 보는 이의 시선을 내면화 한 여성들이 그 무대에 자진해 올라서서 소녀-배우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엄연히 존재하는 ‘관객’의 존재를 애써 못 본 척하는 배우처럼 말이다. 테니스 스커트를 입었던 여성들 개개인이 그 치마를 골라 입었던 이유는 제각각일지라도, 걸그룹이 해당 의상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여성상이 하필 ‘그 치마’를 골라 입는 데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점은 분명해 보인다. 옷이란 기본적으로 ‘보이기 위한 것’이고 어떤 옷을 입을지 고른다는 것은 결국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 지를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걸그룹은 ‘보는 이들’, 즉 이성애자 남성의 욕망을 가장 적극적으로 의식하는 집단이고, 아이돌 집단 내에서 유행하는 패션이란 결국 그들의 입맛에 가장 잘 맞는 여성상을 보여주기 마련이다. 물론 테니스 스커트가 나타낼 수 있는 이미지가 교복이나 소녀뿐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2014년 말부터 시작된 청순 걸그룹의 열풍과 더불어 비슷한 의상을 입은 걸그룹이 눈에 띄게 늘어났을 때, 그들이 보여준 경향성은 뚜렷했다. 아련하고 청순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온순한 미성년자 소녀의 이미지 말이다.

 

  아이유의 <Zezé>가 로리타 논란을 일으키며 인터넷 상에서 여러 갑론을박이 이루어진 이후로, 빠순이들은 투박하게나마 이전에는 없던 어떤 종류의 센서를 가지게 된 듯했다. ‘로리타’라는 투박한 말로 묶여있긴 했지만, 아이돌계에서 반복 재생산하는 미성숙한 여성의 이미지의 존재에 대해 객관적으로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인지는 필연적으로 팬들 자신이 이전에 아이돌을 향유해왔던 방식, 또 아이돌들이 새롭게 내보이는 콘텐츠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도록 만들었다. 특히 매번 컨셉의 차별화를 무기로 삼던 레드벨벳이 이전의 유행을 고스란히 답습한 듯 학교 강당을 배경으로 테니스 스커트, 돌핀 팬츠, 니삭스를 신은 채 등장한 <러시안 룰렛> 뮤직비디오는, 그다지 민감하지 않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조차 어떤 ‘경보’가 울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왜 모두가 이렇게까지 미성숙한 소녀의 이미지에 몰두하는가’에 대한 의문 말이다. 

 

 

나의 취향과 욕구는 온전히 내 것인가

 

  사회가 허락하고 때로는 권장/강요하는 여성상이 매우 한정적이고 좁을 때, 나의 취향이 그 영역 안에 정확히 부합한다면 그것은 정말 순수한 나의 취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스타일이든 모두 각자의 취향으로서 존중받아야 하겠지만, 어떤 스타일의 옷은 분명히 사회가 요구하는 가공된 여성상에 적극적으로 부합하고 이를 재생산한다. 입는 당사자의 ‘진정성’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이상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좁은 취향의 옷이 과할 정도로 크게 유행하는데, 모두가 이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나와 우리의 취향이 어디에서 왔는지, 또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한 번쯤 곰곰이 되돌아봐야 할 때가 아닐까.

 

  테니스 스커트에 대해 처음 트위터에서 언급했던 5월 이후로 세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음악방송에서는 테니스 스커트를 입은 걸그룹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몇 년 사이에 섹시컨셉의 걸그룹은 찾기 힘들어진 대신 아이돌들은 ‘샤샤샤’, ‘오빠’, ‘아잉’ 같은 가사로 대표되는 애교 섞인 노래를 부른다. 설리는 구하라와 찍은 ‘우정 사진’을 인스타그램에서 지웠지만 로타 작가의 ‘야한 마음으로 찍지 않았다’는 그라비아 스타일의 사진은 수많은 아류를 낳으며 아직도 대유행 중이며, 아동복 쇼핑몰에서조차 빨간 홍조에 멍한 눈빛을 컨셉으로 여성 아동들의 화보 이미지를 찍는다. 이 빅 웨이브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몇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내 아이돌이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적으로 응원하는 빠순이든 아니든, 이제는 안락한 ‘취향 존중’의 영역에 안주하여 눈 막고 귀 닫을 것이 아니라 내 취향과 그것이 욕망하는 것에 대하여 직시해야 한다는 것. 또 그런 내 욕망을 겨냥해 만들어낸 아이돌의 이미지가 때로는 편향되고 문제적일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수동적이고 관음적인 이미지의 걸그룹 컨셉을 순순히 받아들여 소비하기엔 ‘각성한 빠순이’들의 눈은 이미 높아져 버렸다는 것.

 

 


2016년 «잡지빠순» 1호에 실린 김뉴님의 글 <#테니스 스커트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를 일부 수정한 글입니다.

 

12월 25일, 미성년자인 에이프릴의 멤버 진솔이 움짤 등 여성 아이돌의 신체 부위를 찍은 성희롱성 게시물에 다시금 자성을 부탁했습니다. 이에 '아이돌이라면 그런 짤이라도 만들어주는 팬의 노고에 감사해야 한다'는 응답이나 노출도가 높은 의상을 문제 삼는 글에 슬럿 워크 프레임을 씌우는 응답 양쪽에 논의를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아 글을 공개합니다.

잡아당기는 것과 들어올리는 건 달라

There’s a difference between pulling and lifting

 

https://youtu.be/zBGU91VJRjE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는 것과 들어 올리는 건 얼마나 다를까? 남자가 ‘반말을 했다’는 이유로 여자의 머리카락을 잡아 올려 비판을 받자, 잡아 당기는 것과 달리 들어올리는 것은 폭력이 아니라고 설명하기 위해 직접 셀카를 찍어올린 10대 해외팬이 있다. 해명은 커녕 폭력에 대한 낮은 기준만을 보여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방탄소년단 팬덤이다. 

 

2016년 11월 6일, 방탄소년단의 뷔(본명 김태형)가 팬사인회에서 반말을 들었다는 이유로 한 여성 팬의 머리카락을 약 8초 간 들어올려 흔들다가 옆자리에 앉은 멤버 진이 말리자 놓은 일로 논란에 올랐다. ‘반말을 했다가 머리채 잡힌 방탄 팬’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해당 영상에서 들리는 ‘귀엽다’는 감탄사로 짐작하자면 촬영자는 귀여운 뷔의 모습을 담고 싶었던 걸로 추측된다. 뷔와 소속사는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고 이 글을 이만 끝맺고 싶으나, 유감스럽게도 가수와 소속사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이하 빅히트)의 재발 방지 약속은 없었다. 

 

대신 소속사는 무응답으로 일관하다 11월 10일 오후 보도자료를 통해 “멤버들이 (루머나 악플에) 오랜 시간 힘들어하고 있다. 그동안 아티스트로서 발전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비판도 겸허히 수용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악의적인 의도를 갖고 창작물과 사생활에 지속적인 비난을 하고 있어 더 이상 간과하지 못할 수준에 이른 것으로 판단된다"며 “온라인 상에 유포되고 있는 악성루머, 허위 사실, 인신공격성 게시글 및 댓글에 방탄소년단 멤버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 법적으로 강경하게 대응하겠다"라고 발표했다. 해당 팬사인회에 대한 입장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이 사건이 ‘머리채 사건’으로 비판받은 직후 배포한 보도자료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빅히트는 같은 해 7월, 공식 팬카페를 통해 그동안 지속적으로 제기된 여성혐오적인 표현들을 사과했다. 팬덤의 대부분은 여성혐오적 가사나 발언을 비판하는 일부 팬들에게 적대적이었으나, 소속사가 공식적으로 사과를 해버리자 방탄소년단이 여성혐오를 극복한 아이돌로서 가능성을 보여준다며 애써 칭찬했다. 그러나 불과 몇 개월 이후인  10월, 첫 앨범 WINGS의 수록곡 <21세기 소녀>가 다시한번 여성 차별적인 가사로 비판받으며 젠더의식이 높은 남자 아이돌로 칭찬 받을 가능성이 요원해지자 성차별 비판을 긍정하고 수용할수록 방탄소년단에게 불리해질 것이라고 판단한 팬이 급증했다. 

 

소속사의 고소 · 고발 예고가 머리채를 잡아 당기지 말라는 지적에 대한 답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료수집의 기준을 명확히 밝히지 않는 소속사에 힘입어 방탄소년단 팬들은 여성혐오 지적글을 아이돌 팬덤 간 시비로 몰아가며 사이버불링을 주도하는 한편, 소속사의 고소를 돕기 위해 해당 글을 캡처했다는 댓글을 무더기로 작성했다.

 

 

누가 위험한 한국 남성의 매력에 열광하는가?

이 글 안에서 인용한 해외 팬들의 국적을 분석하면 국적불명인 사람을 제외하고 확인 가능한 국적은 필리핀, 방글라데시, 터키, 콜롬비아, 모로코, 중국 및 경제 수준에 비해 여성인권이 낮은 일본이다. 국적 불명인 사람들도 네덜란드에서 거주하는 아랍어 사용자, 미국에 거주하는 부친이 페루인인 10대, 스페인어 사용자 등 선진국 내에서도 소외 집단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방탄소년단의 폭력적인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서 영상이 퍼져 나가자 방탄소년단 팬들은 머리채를 잡힌 팬 A에게 영상의 진위 확인을 요청했다. 그러자 A는 ‘반말 때문에 머리채를 잡혔다’거나 ‘멘탈이 깨졌다’, ‘지민이 머리카락을 정리하라고 하더라’는 이전 트윗들을 모두 삭제하고 나는 괜찮으니 더이상의 논쟁을 삼가해달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A가 괜찮다고 쓴 장문의 글은 실시간으로 영어로 번역되어 해외 팬덤에 퍼졌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방탄소년단 팬덤이 A가 괜찮다고 쓴 글만 선택적으로 번역했으며, 해외 팬덤은 피해자가 작성한 멘탈이 깨졌다는 등의 글이 캡처자료로 남아있음에도 이 사실을 무시하거나 가짜 자료라고 주장하였다. 해외 케이팝 매체인 <올케이팝>에도 역시 방탄소년단에게 유리한 자료만 번역한 장문의 옹호글이 유포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방탄소년단의 국내 및 해외 팬덤은 긴밀한 동조 하에 폭력적인 행동으로 비판 받은 뷔를 지지하는 의미로  #StayStrongTaehyung · #ARMYLovesTae · #WeLovesTae 등의 태그를 올렸다.

 

뷔의 행동을 폭력적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죄다 페미나치, 하드페미니스트, 쌍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트위터 계정을 들어가 보았을 때, 갤러리란에 히잡을 쓴 셀피나 마치 케이팝의 미백 시술을 받은 연예인처럼 피부색을 보정한 동남아의 청소년 사진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나는 굉장히 당황했다. 특히 방글라데시 여성들이 고작 머리카락을 잡는 행동은 폭력이 아니고 당사자가 수치심을 느꼈다 하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했을 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방글라데시는 여성 인권이 낮고 이슬람교도가 많으며 여성의 조혼률이 높고 여성 성기 절제술을 여전히 시행하고 있는 나라다. 여권이 낮은 국가에서 케이팝과 한국 남성 아이돌을 좋아하는 여성이 이까짓 행동은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누군가는 이런 지적을 무슬림 혐오라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 3세계에 만연한 여성혐오 비판을 인종차별 주제로 전환하는 것은 정작 여성 피해자의 구제에는 큰 관심이 없는 전형적인 공격이다. 이러한 혐오 지적은 해당 논의들이 남성이 가하는 폭력지적과 해결이나 재발방지에 대해 논하는 단계로 가기도 전에, 해당 남성이 속한 지역, 인종, 국가에서 일부 남성만이 여자를 때린다는 하나마나한 결론으로 끌어내린다.



방탄소년단을 시기하는 사람의 모함일뿐

방탄소년단의 폭력성을 비판하며 영상을 배포한 B에게는 즉각 방탄소년단 팬덤의 공격이 쏟아졌다. 여기에는 해당 글을 고소할 수 있다는 글과 더불어 엑소 팬인 B를 향한 노골적인 욕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논란이 팬덤 싸움으로 번지며 자필 사과문을 올리라는 요청이 쇄도하자, B는 핸드폰 메모장으로 작성한 사과문 외에도 자필 사과문을 추가로 작성했다. 그러나 B가 끝내 모욕적인 메시지들을 고소하겠다는 글을 올릴 정도로 사과문 작성 이후에도 고소 협박 및 욕설이 끊이지 않았다.

 

해외 팬들은 뷔의 행동을 문제삼는 이유가 다른 케이팝 팬들의 시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엑소 멤버의 사진을 내건 B의 프로필은 엑소 팬이 부당하게 방탄소년단을 공격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어 엑소 팬이 거는 팬덤 간 싸움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방탄소년단의 국내 팬들은 B에게 “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당해도 할말은 없으시겠다 ㅋㅋ 그리고 자필로 사과하세욧~!!” 등 공격적인 멘션을 거리낌 없이 보냈다.

 

한국 팬들은 티스토리나 인스티즈 등지에 뷔의 영상을 해명한다며 B의 사과문과 B가 엑소 팬인 증거들을 올려도, 아이돌 팬덤의 외부인으로 간주한 내 트윗에는 항의 멘션을 달지언정 트윗 캡처본을 외부에 게시하지는 않았다. 마치 엑소 팬들만 뷔의 행동을 문제 삼은 것처럼 상황을 요약하면, 방탄소년단을 견제하려는 엑소 팬들이 사소한 문제를 부풀려 중상모략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국내 팬들은 다른 가수의 팬과 아이돌 팬이 아닌 사람, 소위 머글(이하 머글로 표기)을 구분하여 차등을 두었다. 케이팝 해외 팬들의 생활권에서 케이팝 아이돌 얘기를 하는 사람은 대부분 누군가의 팬이기 때문에 방탄소년단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엑소 팬으로 추측하는 확률이 한국인보다 월등히 높다고 추측했다. B는 해외 방탄팬들의 비난을 맞닥뜨리기 전에 한국 팬들 선에서 효과적으로 관리 되었다.

 

널 죽이고 싶어! 

I want to kill you

“빠순이 머리채 잡지 말라는 표현은 페미니즘을 이유로 아이돌 비판하는 사람에게 쓰는 관용적인 표현인데. 현실에선 아이돌이 돈써서 팬싸온 여자의 머리를 진짜로 잡네.... 저게 어디가 서비스냐”

 

B가 트윗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올리자, ‘머리채를 잡는 건 팬 서비스가 아니다’고 적은 내게 들어오는 멘션이 급증했다. 위 트윗이 9천여 번 알티되기까지 트윗을 삭제하지 않자 해외 팬들까지 가세해 멘션을 보내기 시작했다. 내게 한 달여간 멘션을 보낸 계정은 대부분 해외 팬으로, 이들은 위 트윗을 집단적으로 신고하자고 독려했고 결국 내 트위터 계정은 블라인드 처리 되었다. 반면 내가 받은 멘션 중 ‘널 죽이고 싶다’ 등 수위가 높은 트윗을 트위터 고객센터에 신고했음에도 운영규칙이나 법률을 어기지 않았다는 답변만 받았다. 블라인드에 대해서도 수차례 항의했지만 전혀 답변을 받지 못했다.

 

해외 팬이 머글과 엑소 팬 구분을 하지 않은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국내 팬과의 차이는 여전히 크다. 자살하라거나 죽이고 싶다, 페미나치라는 멘션을 보내고 집단적으로 신고해 내 계정을 정지시키려는 움직임은 국내 팬들에게선 단 한 건도 보이지 않았으며 오직 해외 팬들만이 이런 반응을 보였다.

 

머리채를 잡힌 사람이 괜찮다잖아!

A는 항목 영상이 퍼진 초창기에 멘탈이 깨졌다는 트윗도 했으나, “멤버한테 머리채 잡혀보는 것도 색다르고 재밌는 거 같아요”라는 트윗도 작성했다. ‘저 영상 속 사람이 나였더라도 기분이 좋았을 것’이라던 트윗과 유사한 주장이다. 해외 팬의 트윗 중에는 “다치거나 아프지 않았으니 괜찮다”라는 멘션이 있었으며, 이는 A의 해명문 중 “아파서 고개를 숙인게 아니라 그냥 그 상황이 민망하여 혹여나 사진 같은게 찍힐까봐 고개를 숙인 것이었습니다.”라는 주장과 일치한다. 

 

이 부분에서 국내외 방탄소년단 팬들이 입을 맞춘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공공장소에서 다치거나 아파야만 비로소 문제가 된다는 주장이 상당히 우려스럽기 때문이다. 법은 필요 최소한의 제한만을 하기에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더라도 사회적으로 비난이나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시민윤리는 위법을 저지르지 않는 상태에 머무르지 않는다. 따라서 피가 흐르는 상처가 나지 않았더라도 공공장소에서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낀 일도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다.

 

엑소는 네 떡진 머리채를 안잡아줄걸?

Your oppas won’t even touch your ugly oily hair

A는 사인회에 자주 가서 친분이 있기 때문에 뷔가 장난을 쳤다고 주장했고, 팬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만약 뷔가 사회적으로 비판받지 않았다면 무명의 팬 한 명이 가수와 친하다는 주장은 팬덤에서 지지받지 못했을 것이다. 논란이 없었다면 ‘뷔는 내게 심한 장난을 칠 정도로 친한 사이입니다’같은 주장을 하는 팬은 ‘일개 새우젓주제에 망상을 하는 스토커’로 불리고 배척당할 가능성이 높다. 팬사인회에 여러 번 찾아가는 팬들은 많으므로 별 다른 이유가 없는 이상 A가 다른 방탄소년단 팬들보다 더 특별한 친분관계에 있다고는 보기 어려우며, “뷔는 원래 팬들에게 저런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또 앨범을 수십 장에서 수백 장 사서라도 아이돌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는 팬이 못생겼더라도, 아이돌은 대놓고 얼굴을 구기거나 차별해선 안된다. 못생겼거나 과체중인 팬에게 잘 대해주는 행동이 영업 영상으로 자주 유포되는 것이 그 방증이다. 만약 위와  같은 말을 한국인 방탄소년단 팬이 엑소 팬에게 했다면, 대번에 방탄소년단과 달리 엑소는 팬들의 외모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비아냥이나 들었을 것이다.

 

니가 머리채를 잡힌 사람의 글을 조작했겠지

Lmao how do we know you didn't edit that girls supposed comment 

A는 삭제한 트윗과 해명문에서 “멘탈이 깨졌다”와 “민망하여”라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가수를 옹호하기 위해 뷔에 대한 비판을 “진짜 머리채 잡는 짓”으로 보았고 ‘머리카락’이 잡힌 자신은 단지 장난을 주고받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팬들도 A가 민망함과 불편함을 표현한 트윗을 못 본 척 했고 심지어 반말로 뷔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문제의 발단이라고도 주장했다. 해외 팬들은 한국 팬보다 더 적극적으로 A가 느낀 민망한 감정을 부정했다. A의 이전 트윗을 번역해도 조작으로 몰았으며, 심지어 뷔의 팬사인회에 대한 인터넷 신문의 기사를 가져다 주어도 본인들은 한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방탄소년단 팬덤 내에서 번역한 글만 믿겠다고 말한 해외 팬도 있었다. 

 

뷔는 위안부생존자를 지지하니깐, 여자의 머리채를 잡을리 없어

해외 팬은 사인회에 대한 이해나 경험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와 역사에 대해서도 무지한 면모를 보였다. 위안부를 후원하는 마리몬드 팔찌를 착용한 뷔가 여성 팬에게 폭력을 휘두를리 없다는 멘션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마리몬드 티셔츠나 희움 팔찌를 착용하는 연예인은 아주 많다. 여성주의자라서 여성 대상 전쟁범죄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반일감정 때문에 일본의 조선에 대하 전쟁범죄만을 규탄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방탄소년단의 해외 팬들은 이렇게 흔한 사례 중 하나가 특별하고 드문 일인줄 알고 있었다.

 

해외 팬들은 한국어에 서투르기에 자발적인 무급 번역가 팬들이 번역한 정보만으로 사건을 이해한다. 방탄소년단 팬덤은 대부분의 한국 아이돌들이 이러한 제품을 착용했다는 정보를 번역하지 않았다. 엑소 첸, 미스에이 수지, 비스트 요섭등도 마리몬드나 희움 제품을 사용한 적 있으나 내게 말을 건 이 팬들은 방탄소년단만 하는 행동인줄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방탄소년단의 뷔가 한국인들에게 위안부 문제를 일깨우고 후원 방법을 홍보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까지 한국 상황에 무지할 수 있는 이유는 한국의 네이버나 다음같은 포탈 사이트에 접속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팬 활동을 할 수 있는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팬덤 내 번역가들이 영문 자막을 넣은 영상들을 트위터에서 얼마든지 접할 수 있다. 팬덤 내부의 번역가들은 해당 팬덤이나 가수에 유리한 자료만을 편파적으로 번역한다. 한국 팬들은 다른 아이돌도 흔히 하고, 사회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 일일지라도 윤리적이고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 과장하는 영업 자료를 만든다. 한국인이라면 팬덤 내부에서 만든 카드뉴스와 유사한 형식의 가짜 정보들을 거를 수 있는 배경지식이 있다. 그러나 한국을 잘 모르는 외국인은 그런 배경지식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빅히트는 이러한 해외 팬덤의 정보 유통 과정을 숙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빅히트는 해외 팬들의 활동이 활발한 트위터에는 여성혐오 논란에 대한 해명이 들어있는 공지를 올리지 않았으며 한국 팬의 접근이 쉬운 공식 카페에만 게시했다. 무급 번역가인 해외 팬들은 유리한 정보만 번역하며, 방탄소년단의 소속사도 불리한 정보는 해외 팬의 접근성이 낮은 곳에 게시한다. 그러나 해외 팬들에게는 이러한 주장이 논리적이고 그럴듯한 말로 들리는 것이다.



‘터키에선 아무 이유없이 여자들이 살해되는데, 넌 고작 머리채 잡힌 게 문제라고 생각해?’

Come here they kill women for nothing, and you still call pulling hair is the worst?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남성이 동의 없이 여성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행동이 나쁘다는 점을 설득할 수 있는 가능성도 낮다고 판단했다. 한 여성 팬은 터키에선 여자들이 이유 없이 살해당하는데 너는 고작 머리카락 얘기를 하고 있느냐고 화를 냈다. 한국에서도 여자들은 이유없이 살해당한다. 한국에서도 여자들이 강력범죄에 희생되고 있으며 이유 없이 살해된 여자를 추모하기 위해 강남역에서 시위를 크게 했다는 정보를 이 해외 팬에게 알려주어도, 엑소와 엑소 팬이 다 죽길 바란다는 답이나 돌아올 뿐이었다. 영국에 거주하는 방글라데시인은 본인은 무슬림으로서 폭력이 나쁘다는 교육을 받아왔으며 거미도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배웠다고 트윗했으나, A가 당한 일은 폭력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 정도로 기준이 다른 사람에게 저런 행동이 폭력적임을 설득할 방법을 찾기란 어려웠다. 

 

팬들의 국적에 따라 페미니즘과 폭력에 대한 의견의 수위가 달랐으며, 그 배경에 이들이 거주하는 문화권이나 국적의 영향이 보이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인 팬은 직접적으로 뷔가 한 행동을 무조건 긍정하지는 않았으며, 뷔의 행동에 대해 지적하기 전에 가정폭력이 나오는 <장난스런 키스>, <상속자>, <시크릿 가든> 등 한국 드라마의 폭력적인 묘사에 대해 항의하라고 주장했다. 여성의 손목을 잡아끈다거나 강제로 키스하는 행동이 문제임을 알고 있기에 이런 식으로 돌려서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터키 팬이나 필리핀 팬이 내게 엑소가 이런 식으로 만져주지 않아서 질투하느냐는 질문을 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여성 인권이 낮은 국가의 팬일수록 페미나치라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여자가 다치지 않았으므로 괜찮다고 주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제일 활발히 항의한 터키 팬의 발언 또한 흥미로웠다. 이 팬은 자신이 속한 문화권에서 여성 인권은 무분별한 서구적 가치의 수용이라고 비판하는 안티 페미니즘 논리를 그대로 가져와 내게 주장했다. 비서구권에서 여성 인권의 향상을 반대하기 위해 민족주의적인 가치를 토대로 우리의 전통은 원래 이런 것이며 남녀가 동등할 권리를 주장하는 자는 서구 제국주의를 추종하는 매국노라고 주장하는 식이다. 

 

자신이 속한 문화권에서 여성 인권이 낮아 학대받아왔다 할지라도 타국의 여성이 고작 이 정도의 문제로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비난할 권리는 없다. 그들에게 만리타국에서 한국 남자 연예인의 얼굴이나 춤을 즐기며 그 한국 남성을 옹호하기 위해 한국 여성들에게 이 정도는 감수하라고 요구할 권리를 줄 이유는 없다.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중국인 팬은 내게 한국 드라마 안의 폭력을 지적하고 난 뒤에야 뷔의 행동을 지적하라고 요구했지만, 그 이중성과 별개로 한류 콘텐츠 속의 성차별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는 있다. 한국 문화 콘텐츠의 성차별적 내용들은 한류가 유행하기 전부터 꾸준히 지적받아왔으나, 성차별적인 내용과 한류의 인기를 결부시킨 분석은 여전히 부족하다. 

 

 

전통적 성역할을 깨는 대안적 남성성으로서 한국 남성과 케이팝의 세계적 인기

2019년 8월에 열린 ‘BTS 인사이트 포럼’에 참여한 영국 킹스턴대 영화·미디어학부의 콜레트 발메인(57) 교수는 방탄소년단을 전통적 성역할을 깨는 대안적 남성성으로 제시했다. 마초적 남성성에서 벗어난 사내아이 감수성으로 “‘미투 운동’ 이후 유해한 남성성에 대한 대안으로서도 시의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한류 관련 홍보 책자나 논문 등에는 한류 콘텐츠가 제 1세계 콘텐츠보다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낮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많다. 명확히 말을 하지 않을 뿐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KOCIS(해외 문화 홍보원)이 한류의 원인을 분석한  2011년의 «The Korean Wave»에 따르면, 한국 드라마는 중앙아시아와 무슬림 국가의 기존의 가치관을 거스르지 않는 안전한 콘텐츠로 정부에 대한 충성심을 강화한다. 한국 드라마와 미국 드라마의 차이가 선정성 뿐만인 것은 아니다. 유교적 가치, 가족을 강조하는 내용에 녹아있는 가부장제 등 많은 요소들이 다르다. 국내외의 많은 연구자들도 한류의 인기가 “모던”하지만 서구와는 달리 “아시아적 가치를 존중하는” 콘텐츠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케이팝을 소비하는 사람들도 이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Being Active Consumers: Indonesian Muslim Youth Engaging with Korean Television Dramas» 에 실린 22살 인도네시아 무슬림 여성 Dika는 서구 국가들과 달리 전통적인 가치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이 좋다고 말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이 높은 수준의 인권과 경제 발전을 성취하기 위해 중간 단계의 목표 혹은 달성 가능한 현실성 있는 목표로 한국을 롤모델로 삼을 수는 있다. 

 

 그러나 중간 단계나 위로 가기 위한 현실적인 목표 설정이 아닌, 거슬리지 않는 적당한 수위의 문화로 소비하는 사람도 많다. 가족적인 가치나 종교적 가치와 조화되기 때문에 한국 문화 상품을 좋아한다는 인터뷰가 «Being Active Consumers: Indonesian Muslim Youth Engaging with Korean Television Dramas» 에 다수 있으며, «The End of Cool Japan- Ethical, Legal, and Cultural Challenges to Japanese Popular Culture»에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BL과 종교적 신념을 조화시키는 사람들의 인터뷰가 실려있다. 이들은 일본 만화나 야오이, 케이팝이 종교 및 전통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는 조화보다는 타협에 가깝다. 가족적인 가치나 종교적인 가치를 비판하기보다는 자신이 즐기는 문화가 내가 선망하는 가치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골몰하기 때문이다.  

 

«Being Active Consumers»에 나온 19세 여성 Zulia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무슬림 젊은이들은 아이돌처럼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조차도 이슬람 규범을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고 여긴다. 이런 결론도 케이팝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이긴 할 것이나 그 수용이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주체적으로 한국의 콘텐츠를 받아들인 결과가 자신의 아이돌을 옹호하기 위해 페미나치, 하드 페미니스트를 외치며 다치지도 않았는데 뭐가 문제냐는 주장을 하는 것이라면 그들의 주체적인 선택을 비판해야 할 것이다.

 

전세계의 방탄소년단 팬들이 너한테 보복할거야 개년아!

are you aware of how many international ARMYS exist? What you did to Taehyung will spread expect backlash bitch!

 

 

다른 의견을 빌미로 “자살하라”거나 “창녀야”, “죽이고 싶다” 등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수백명의 방탄소년단 해외 팬들에게 몇개월 동안 저런 멘션을 받았으며, 위 트윗들을 신고했으나 트위터의 이용 규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답만 돌아왔을 뿐이었다. 이외에도 해외 방탄 팬들은 방탄소년단을 욕했다는 이유가 아닌 다른 여러가지 이유를 붙여서 내 계정을 신고했다. 그 결과 블라인드를 당한 계정은 내게 죽으라는 말을 한 방탄소년단 팬들이 아닌 나였다. 고작 저 영상이 팬 서비스가 아니라는 말을 한 대가가 몇달 간의 괴롭힘과 트위터 계정 블라인드 처리라니 방탄소년단 팬들의 충성심이 대단했다. 트위터 고객센터에 한국어와 영어로 상황 설명을 하고 메일을 수차례 보냈으나 답장은 단 한번도 오지 않았으며, 협박 욕설등을 신고해도 해당 국가의 법률을 위반하지 않았으므로 개인적으로 고소하라는 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블라인드는 계정 정지, 트윗 삭제와는 다른 상태로 다른 사람에게 멘션을 하더라도 알림이 가지 않으며  계정의 주소로 들어와서 글을 보지 않는 이상 그 계정을 구독하는 사람들조차 해당 계정의 글을 볼 수 없게 된다. 검색도 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계정을 삭제하진 않았으나 다른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해지는 상태이다. 블라인드 상태가 되자 내가 글을 지우고 도망갔다고 욕하는 멘션을 보내거나 못생긴 엑소 팬이 드디어 죽었다(사라졌다)는 대화를 자기들끼리 주고 받았다. 블라인드 상태는 4개월이 지난 후에야 풀렸다. 

 

트위터의 신고 시스템은 이러한 아이돌 팬덤의 사이버불링을 거르지 못했다. 공격하는 팬들은 다수이고 당하는 사람은 소수이기 때문에, 신고된 글의 내용을 보지 않고 많은 신고를 당한 글을 기계적으로 처리하면 오히려 괴롭힘 당하는 사람의 계정이 정지되거나  블라인드 처리 되었다. 이런 사례는 다른 팬덤이나 다른 사건에서도 반복되었다. 케이팝 팬덤의 의식이 크게 개선되지 않는 이상 앞으로 인터넷상의 이러한 괴롭힘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진군하는 케이팝

한국 인터넷은 메갈리아 이후  “페미나치”나 “꼴페미”같은 단어를 쓰는 여초 사이트들이 감소했고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에 한국 팬들은 페미니즘과 관련된 주제에서는 주로 우회적인 공격을 선호하며 이 부분은 이 글에서 예시를 든 국가의 팬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다. 해외 팬과 국내 팬의 사이버불링에 나타나는 강도의 차이는 해외 팬들이 국내 팬보다 몇 가지 제약을 덜 받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여성 인권의 수준 차이는 구체적인 표현에 영향을 미쳤으나 이들의 발화 목적은 같았다. 두 명의 터키 팬은 방탄소년단을 욕하는 나를 살해해서 나를 유명하게 만들어주겠다고 공언했다. 아마 이 둘이 한국인이었다면 이러한 트윗이 법적으로 처벌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좀더 조심했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 몬스타엑스의 원호의 절도와 채무를 폭로한 한서희, 정다은의 인스타에 달린 댓글도 이와 비슷하다. 정다은의 돈을 갚으라는 한서희의 인스타 게시물에는 3일만에 5만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일부는 한서희를 지지하는 글이나 대부분은  한서희를 조롱하거나 몬스타엑스의 노래가사를 쓰며 항의하는 댓들이다. 살해 협박이나 성적인 욕은 신고를 당해서 여러 댓글이 사라졌지만, 삐에로와 뱀 이모티콘으로 도배한 글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뱀 이모지는 2016년 카니예 웨스트와 킴 카다시안이 테일러 스위프트를 조롱하며 시작된 밈이다. 이들에게 살해 협박 혹은 강도 높은 인신공격을 하는 사람은 한국여성보다는 해외 여성이 더 많았다.

 

해당 글이 비판하는 제 3세계 아미 여성들은 남자의 머리채를 잡을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한국보다 여성인권이 더 낮은 곳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여성인권 후진국에서 한국 여성이 당하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제 3세계 여성에 대한 비판은 그들이 거주하는 국가에서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들도 비판적으로 봄을 전제한다. 케이팝이 여성인권 후진국의 여성들이 여성에 대한 폭력을 학습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되며, 그런 여성들이 한국내의 여성차별을 정당화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어서도 안된다. 

 

방탄소년단의 팬클럽 이름은 아미(Army)이다. 이 충실한 팬들은 장애물을 격파하고 진군할 의지가 충만하다. 특히 사이버불링을 할 정도로 저돌적인 팬들에게 아이돌 팬으로서의 인생보다 여성으로서의 인생이 길다거나,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해서 아이돌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 할 필요가 없다는 설득은 효과가 없다. 이들은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때 느끼는 보람, 소속감, 가수의 평판을 통해 느끼는 대리 만족 등의 이득을 알고 있다. 집단적인 행동을 할 때 윤리와 이성이 어느 정도 마비됨을 고려하더라도 팬덤의 움직임은 무지와 열정보다는 정치적 선택이 행동 동기를 더 잘 설명한다. 아이돌 팬덤의 집단적인 괴롭힘을 규제할 제도나 인력은 없으며 아이돌 소속사는 이를 방치하거나 심지어 이렇게 공격적인 사이버불링을 장려하고 이용하기도 한다. 케이팝이 여성 인권이 높은 나라보다 젠더감수성이 떨어지는 콘텐츠이기 때문에 장사가 잘 되고 있음을 잘 알고 그런 점을 세일즈 하고 있다면, 팬덤 스스로 이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수정을 요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Yo 내가 What’s Up?! Come on"

 

2017년 8월 24일, 케이팝 그룹 워너원의 김재환이 음악방송 <쇼챔피언 야해줄래VCR> 에서 흑인을 비하하는 니가(nigger, 이하 n word)를 연상하게 하는 랩을 선보이며 케이팝 내 인종차별 논란이 다시금 구설에 올랐다. 국내 케이팝 소식을 전달하는 해외매체 Koreaboo(이하 코리아부)는 ‘김재환이 n word를 사용했으며 MBC가 이를 해결하려 애쓰고 있다’라고 보도하면서 국내 케이팝 팬들의 주의를 끌었고, 조용했던 국내 언론도 뒤이어 김재환의 차별 발언 논란을 보도했다. 이에 맞서 김재환의 팬들은  ‘내가'는 n word와 발음이 비슷할 뿐, ‘나'를 의미하는 순수한 한국어라는 주장을 펼쳤다. 인종차별이라는 부정적 여론을 의식한 팬들이 기획사에게 코리아부를 비롯해 허위사실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고소하여 아티스트의 신변을 보호하라며 #YMC에게_강경대응을_요구합니다 를 SNS 실트에 올려 대대적으로 항의하자, 쇼팸피언 공식계정은 8월 25일에서야 공식 해명을 냈다. “쇼챔피언 야해줄래VCR에 나온 김재환의 영상은 자막에도 표기된 것처럼 ‘내가 왔어'를 즉흥랩 형식으로 표현한 것뿐"이며 “어떠한 의미나 의도가 전혀 없다.”

 

팬들을 중심으로 단순히 아이돌을 편드는 것처럼 보였던 논쟁은 순식간에 팬덤 외부에서 해당 논쟁을 ‘자국 문화 중심주의(Ethnocentrism)’ 또는 ‘영어 중심주의’라 비판하며 되려 영어가 모국어인 해외팬들의 언어 기득권을 비판하는 여론으로 전환해 전개됐다. 영어권 사용자가 한국어를 이용한 단순한 말장난을 영어 발음과 유사하다는 이유만으로 억지를 부린다는 비판이었다. 다른 언어권에서 전혀 다른 의미로 존재하는 단어를 지우는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이라는 수사 또한 등장했다. n word는 한국에 없는 문화라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이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혐의가 없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를 뒷받침하듯 팬들은 김재환이 워너원 데뷔 이후에야 처음으로 해외에 출국했기 때문에 영어권 비하 언어를 몰랐을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어느 트위터리안은 ‘내가'를 ‘니가'로 발음하는 것은 한국어의 구어식 발음이며, 케이팝 가사는 구어적 사용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는 근거를 들었다. 같은 맥락에서 n word처럼 들리는 모든 가사를 맥락과 관계없이 삭제하라는 부당한 지침이 있었다는 고발이 이어졌는데, 한국에 기반한 케이팝이 글로벌 시장을 의식하기보다 지역적 특색을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었다.

 

 

다수의 케이팝 팬들이 코리아부의 트위터·페이스북 계정을 신고하며 보이콧 선언을 이어가자 코리아부는 8월 27일에 영문판 칼럼과 함께 이례적으로 한국어 번역판을 공개해 한국어에 무지한 해외팬이 실수로 ‘내가’ 발언을 인종차별로 받아들였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코리아부는 ‘What’s up’이 ‘내가'와 함께 사용된 것을 문제 삼으며 김재환의 의도와 관계없이 해당 발언을 결과적으로 n word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한국 힙합의 특징은 대중성이다. ‘내가 와썹'은 한국 힙합 래퍼들이 흑인 랩의 ‘niggas what’s up’을 변형한 말장난에서 시작해 대중에게 유행어로 정착했다. ‘내가 와썹’의 인터넷 검색 기록은 2010년부터 찾을 수 있다. 힙합 갤러리의 “ayo~ 와써와썹 내가와써 mic를 잡고 롤을하는 내가와썹”과 연예인 갤러리의 “응사갤에서 와썹 와썹 바로 내가와썹 mic는 내가 쥐고있는 내가 왔썹”을 예로 들 수 있다. 내가와썹 밈이 힙합 랩에 등장하는 ayo 또는 mic과 함께 쓰이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쇼챔 측은 재환의 발언 영상에 “쇼미더랩재환”이라는 자막을 삽입해 그가 랩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주고 힙합의 억양과 몸짓을 유사하게 재현했다. 그리고 n word를 제외한 부분을 텍스트상으로 똑같이 재현한 “Yo 내가 What’s Up?!” 이라는 자막을 넣어 그의 대사가 ‘Yo nigga what’s up’의 힙합 밈을 변형했음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도록 했다.

 

케이팝 팬덤에게 n word 밈이 낯설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약하다. 블락비의 전 멤버 지코가 아이돌 활동과 개인적인 힙합 크루 활동의 선을 긋는 등 여전히 힙합과의 거리감이 남아 있지만, 아이돌과 힙합의 벽을 허물고 싶다고 밝힌 빅뱅의 지드래곤을 필두로 2019년 현재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방탄소년단이 믹스테이프를 발표하는 등 힙합 문화는 아이돌 씬에도 익숙하게 자리하기 시작했다. 

 

1세대 아이돌 그룹은 교포 출신 래퍼들을 영입하며 힙합의 랩 문화를 친숙하게 알렸다. 1990년대 중후반 힙합 패션을 주도했던 1세대 아이돌 젝키, 유승준과 1TIME은 모두 교포 출신 래퍼를 영입한 사례다. 당시 유행했던 케이팝 가사에는 특별한 제재 없이 n word가 쓰였다. 

 

신화 <YO!(악동보고서)>

Yo 너 뭐 될래 진짜 니 맘대로 살아 갖고 뭐 할래 

Do you live for me niggas answer me 

모든 걸 잃어버린 실패자나 되지마 

 

H.O.T. <You Got Gun?> 

strictly flex as you can’t flex or test the best the

westside niggar cosat the boast the moast l filla flow 

for sure you niggar’s know what l be I.E filla flow

M.C get down I wit the funky ass sound

 

2000년 중반 즈음 유튜브를 통해 유입된 글로벌 팬덤은 케이팝에 n word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사용된 표현뿐만 아니라 종종 유사한 발음까지도 문제 삼았다. ‘니가’를 강조해서 부르는 원타임의 <니가 날 알어?>, ‘내가’를 빠르게 반복하는 2NE1의 <내가 제일 잘 나가>, ‘니가’를 쉴 새 없이 외치는 싸이의 <챔피언>이 혹독한 비판의 대상에 올랐다.

 

2NE1 <내가 제일 잘 나가> 

내가 제일 잘 나가

내가 제일 잘 나가

누가? 네가 나보다 더 잘 나가?

No no no no!

Na na na na

 

싸이 <챔피언>

챔피언 소리 지르는 네가 

챔피언 음악에 미치는 네가 

챔피언 인생 즐기는 네가 

챔피언 네가 챔피언 네가 

챔피언 소리 지르는 네가 

챔피언 음악에 미치는 네가 

챔피언 인생 즐기는 네가 챔피언



한글을 공부한 외국인 팬덤 일부가 해당 가사의 ‘내가’는 ‘나’를 의미하는 한국어라고 해명하는 유튜브 영상을 올리기도 했지만, 개중에는 빠른 랩을 바탕으로 ‘내가’와 n word가 교차하는 지점을 노린 가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글로벌 팬덤이 인종차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에도 나름의 근거는 있었다. 국내의 유명 걸그룹 멤버가 라디오 방송 중 ‘흑인치고는 예쁘다’라고 발언하거나, 인기 있는 보이그룹 멤버가 얼굴을 검게 칠한 사진을 업로드하는 등 흑인을 향한 인종차별 논란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외의 논란은 주로 아이돌이 sns에 올린 사적 발언이나 다른 가수의 곡을 커버하는 영상에서 n word를 있는 그대로 옮기던 중 불거졌다. 빅뱅의 태양이 sns 계정에서 친구의 닉네임을 ‘Ma NiggA!!’로 설정한 것과 갓세븐의 뱀뱀이 지인이 올린 영상을 통해 친구들에게 “come on my nigga”라고 말하는 장면이 공개되어 사과를 요구받은 사례가 그 예다. NCT의 재현이 라디오 방송 중 래퍼 아미네(Aminé)의 곡 <Caroline>의 ‘Killa westside nigga’ 가사를 여과 없이 따라 부른 경우도 문제가 됐다. 팬들이 ‘내가와썹’ 논란을 조기에 잠재우려 애썼던 이유도, 위의 비판을 받아들인 케이팝 제작자들이 n word와 유사한 가사를 최대한 줄이고 아이돌의 sns 계정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지지하는 아이돌의 무고가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이돌 팬덤은 한 번 잘못을 인정하면 아이돌이 은퇴하기까지 이미지에 족쇄가 된다고 믿기 때문에 어떤 잘못이든 일단 부인하고보는 습관이 있다. 그런데도 해외팬은 국내 팬덤의 불문율과 맞서 종종 비판을 서슴지 않아 아이돌의 생명인 이미지 관리를 망치곤 하니 눈엣가시로 여겨진다.

 

영어 기득권에 대한  팬덤 내외부의 비판 기저에는 내셔널리즘 또한 짙게 깔려있다.  국내 언론은 외국인이 케이팝 가사를 공부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케이팝의 글로벌화가 한글 수출로 이어지고 있다고 시종일관 자랑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한국인과 외국인 중 어느쪽이 한국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는지 점수를 매겨 대결을 펼치는 예능 프로그램 <대한 외국인>을 필두로, 한국문화에 익숙한 외국인을 기특해하는 포멧이 꾸준히 사랑받는 현실을 상기하면 이런 비판이 그다지 놀랍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이돌이 팬들과 만남의 창구로 주로 이용하는 V LIVE 영상 스트리밍 사이트나 sns에 업로드한 게시물을 영어로 해석해달라는 ‘Oppa English please’로 ‘도배’되면, 팬덤 내외부를 가리지 않고 ‘한국인에게 영어를 요구하지 말고 한국어를 공부하라’는 날 선 비판이 눈에 띄게 쏟아진다. ‘내가와썹’ 논란이 한국어를 배울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영어권 국민의 자의식과 즉각 연결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사실여부를 차치하고 아이돌이 논란에 휘말리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팬덤 특유의 문화와 글로벌 케이팝을 외치면서도 자국 문화가 우선한다는 이중적인 잣대의 혼종이 케이팝의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논의를 조기에 차단해버린 것이다.

 

 

    케이팝이 타문화에 무지해서 벌어지는 인종차별적 해프닝들은 여러 번 지적돼 왔다. 이외에도 종종 제기되는 인종차별 이슈로는 엑소 <코코밥> 무대에서 카이의 헤어스타일인 레게머리가 아프리카계 흑인의 문화전용으로 비판받았던 사례를 들 수 있다.  논쟁이 반복될 때마다 외국인과 바퀴벌레의 합성어인 ‘외퀴' 비하 발언이 빠지지 않는 것도 케이팝 팬덤의 고질적인 인종차별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에 대해 또 다른 트위터리안은 “한국인 팬들이 외국인 팬들에게 반감을 표현하지 않고 아주 시혜적인 호의를 표현할 때는 오로지 앨범을 많이 사주고 한국의 구린 면까지 사랑한다고 표현할 때뿐"이라고 비꼬았다. 

 

흑인 케이팝 팬이 모이는 사이트인 BFK(Black Kpop Fans)는 ‘케이팝은 흑인 문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는데도 한국인 팬들이 흑인들에게 한국문화를 존중하지 않을 거면 팬덤에서 나가라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아이러니하다'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한국인들이 말장난으로 삼는 ‘내가 와썹’은 n word를 간접적으로 표현해 흑인을 비하하는 수단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케이팝의 해외 공연 비중이 확대되면서 국내 팬이 해외 콘서트 현장에서 당한 인종차별을 공론화하는 사례도 크게 늘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본인들이 당하는 차별에는 굉장히 민감하지만 다른 유색인종이 받는 차별에는 둔감하다는 비판도 이어졌다. 케이팝은 한국 내에 고립된 전통적인 문화산업이 아니다. 다국적의 작업자가 모여 만든 콘텐츠가 전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어 유튜브를 통해 퍼져나간다. n word에 대한 비판과 수정의 역사는 케이팝의 역사와 함께할만큼 오래됐는데도, 국내의 케이팝 소비자들은 점점 심화돼가는 내셔널리즘적 자세와 함께 역사를 거꾸로 되짚어가고있다. 정말 글로벌한 케이팝을 원한다면, 타국이 지닌 차별의 역사를 무시하고 한국의 문화만 내세우는 태도가 미칠 악영향을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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